위만조선은 한나라-위만조선-진국(삼한)을 잇는 삼각무역의 중심축이었습니다.
위만조선 시대의 동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와 주요 교역품 흐름도
위만조선 시대에는 명도전(明刀錢)을 비롯한 다양한 화폐가 유통되었습니다:
위만조선은 연나라로부터 도입한 선진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했습니다:
위만조선은 진국과 한나라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로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습니다. "진국이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교역할 때는 반드시 조선을 통해서 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단순히 남북 교역만이 아닌, 동서 방향의 교역로도 개척하여 동아시아 교역의 허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위만조선은 초기 실크로드 네트워크의 동쪽 끝단으로서, 중앙아시아와 한반도를 잇는 중요한 교역 거점이었습니다.
기원전 128년,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압박하기 위해 창해군을 설치했으나 3년 만에 폐지했습니다.
기원전 109년, "진번에 남접한 진국이 한에 입조하려는 것을 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무제는 위만조선과 흉노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여 현도와 낙랑을 일으켜
흉노의 왼쪽 팔을 잘랐다"
- 『한서』
| 구분 | 내용 | 수익원 |
|---|---|---|
| 관세 | 통과 물품에 대한 세금 | 물품 가치의 10-20% 추정 |
| 중개 수수료 | 거래 알선 및 보증 | 거래액의 5-10% 추정 |
| 독점 이익 | 가격 차익 실현 | 남북 가격차의 30-50% |
| 부가 서비스 | 창고, 숙박, 호송 | 서비스 요금 |
위만조선은 86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동아시아 최대의 중계무역 국가로 번영했습니다.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경제 전략, 선진 철기 기술, 체계적인 무역 시스템은 고대 동아시아 경제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비록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멸망했지만, 위만조선이 구축한 무역 네트워크와 경제 시스템은 이후 낙랑군 시대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외 무역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계무역의 강자 위만조선 - 그들의 경제 전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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