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신이문역 인근, 지하로 꺾여 내려가는 통로는 늘 약간의 불안과 함께 기억된다. 낮에는 그늘진 짧은 통로일 뿐이지만, 밤이 되면 구조 자체가 하나의 위험 요소가 된다. 이런 도시의 어두운 골격 속에 동대문구가 새로운 장치를 하나 심어 놓았다. 이름부터 다소 섬뜩하고도 절박한 장치, ‘비명 인식 비상벨’이다. 이제 이 지하보차도에서는 비명을 지르는 행위가 곧 하나의 신고 동작이 되고, 구조 요청이 된다.
![]() [코리안투데이] 비명만 질러도 112에 신고가 되는 비상벨을 신이문 지하차도에 설치된 모습(사진제공: 인스타그램 ddmguide) ⓒ 박찬두 기자 |
신이문 지하보차도는 신이문역 바로 앞에 놓여 있다. 유동 인구가 적지 않은 곳이지만, 통로 길이에 비해 비상벨 수가 턱없이 적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특히 손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 가해자와의 거리, 공포로 인한 판단력 저하 등을 고려하면, 벽면 어딘가에 설치된 작은 버튼을 찾아 눌러야만 하는 구조는 실질적 위기 상황에서 충분히 작동하지 못한다. 여성과 청소년, 야간 보행자들이 이 통로를 지날 때 느끼는 불안은 그 빈틈을 예민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동대문구는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서울시 ‘2025년 지하공간 비명 인식 비상벨 설치 공모사업’에 참여했고, 이 공모에 선정되면서 신이문 지하보차도에 최신 음성인식 기술을 적용한 비상벨을 시범 도입했다. 이 장치는 기존의 비상벨과는 작동 원리부터 다르다. 더 이상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다. 특정한 단어를 포함한 비명성 음성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감지되면, 장치는 스스로 눈을 뜨듯 작동을 시작한다. 도시의 벽이 ‘귀’를 갖게 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사람 살려”와 같이 사전에 등록된 비명성 음성이 주변에서 일정 데시벨(소리를 측정하는 단위) 이상으로 감지되면, 비상벨 시스템은 지체 없이 반응한다. 곧바로 경고 사이렌이 울리고, 경찰 상황실과 자동으로 연동된다. 이 연동은 단순한 신호 전달을 넘어, 현장 음성이 즉시 전달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피해자가 장치 위치를 찾아가 손으로 누르는 시간, 혹은 스스로가 위기 상황을 인지하고 신고 번호를 떠올리기까지의 시간이 통째로 단축되는 셈이다. 이 장치는 비명을 ‘신호’로 변환하고, 공포를 ‘호출’로 치환해 준다.
구조적으로 폐쇄된 지하공간은 늘 안전의 사각지대였다. 지상과 달리 눈여겨보는 시선이 적고, 주변에 즉각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요인이 부족하다. 소리가 반사되는 벽면, 긴 직선 구조, 시야가 제한된 곡선 통로. 이 어둠의 물리적 구조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대응을 늦춘다.
동대문구청장 이필형은 이러한 특성을 분명하게 짚어낸다. 지하공간은 구조상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고, 사고가 나면 대응이 늦어지기 쉬운 대표적인 안전 사각지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장치의 핵심은 ‘실제 위급 상황에서 바로 작동하는지’에 맞추어져 있다. 도시의 안전 장치가 장식이 아니라 현실의 시간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요구다.
비명 인식 비상벨의 도입은 기술적 업그레이드를 넘어, 안전의 개념을 바꾸는 시도이기도 하다. 기존의 비상벨은 행위자의 의식적인 선택, 즉 ‘누른다’는 행동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명 인식 비상벨은 통증과 공포의 반사적인 발화, 곧 비명을 하나의 ‘행동’으로 전환시킨다. 피해자가 무엇을 누르거나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 몰라도, 혹은 팔과 손이 자유롭지 않아도, 구체적인 신고 행위는 비명 자체를 통해 일정 부분 자동화된다. 도시에서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소리가, 기술을 매개로 하나의 구조 신호로 재구성되는 지점이다.
![]() [코리안투데이] 신이문 지하차도에 설치된 ‘비명 인식 비상벨’ 모습(사진제공: 문화일보, 동대문구청) ⓒ 박찬두 기자 |
이 장치는 또 다른 차원에서 상징성을 지닌다. 일상적인 이동 경로에서 늘 ‘위험을 감수해야만 지나갈 수 있는 길’로 여겨지던 지하보차도와 지하보도 같은 공간을, ‘안심하고 통과할 수 있는 길’로 바꾸려는 의지가 기술과 결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동대문구는 이번 시범 설치를 시작으로, 지하보차도와 지하보도 등 폐쇄적 구조로 인해 불안감이 큰 공간을 중심으로 안전시설을 단계적으로 확충할 계획이다. 단순히 설치에 그치지 않고, 범죄 예방 효과와 이용자 만족도 등을 면밀히 분석해 추가 설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 사업이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인 안전 인프라 재편의 출발점임을 시사한다.
도시의 안전은 숫자로만 환산되는 것이 아니라, 체감되는 안심의 밀도 속에서 확인된다. 통로를 지날 때 뒤를 한 번 더 돌아보는 사람의 습관, 귀를 곧추세우는 야간 보행자의 긴장, 자정 이후 지하공간을 피하려는 이들의 우회 동선이 모두 그 도시의 정서를 말해준다.
이번 비명 인식 비상벨 설치는, 그 정서를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한 장치다. 무방비 상태의 불안에 내맡겨졌던 공간에, 대응과 개입의 시간이 끼어 들어왔다. 위험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첫 순간에 개입하는 기술적 귀 하나가 어둠 속에 열렸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도시가 시민의 비명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다. 무시하거나 늦게 듣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첫 파열음을 그 자리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시도. 동대문구가 신이문 지하보차도에 심어 놓은 이 작은 장치는,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결코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하나의 약속이자, 도시가 스스로의 어두운 길목을 다시 설계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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