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9화: 후연과의 대결 – 요동 벌판의 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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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Korean Today News

[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9화: 후연과의 대결 – 요동 벌판의 승자

 

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고구려 편

제9화: 후연과의 대결 – 요동 벌판의 승자

역사는 복수로 쓰인다. 342년 선비족 모용씨가 고구려 수도를 짓밟고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쳤을 때, 누가 60년 후 그 후예들이 광개토왕 앞에 무릎을 꿇게 될 줄 알았겠는가.

5호16국 시대 혼란의 중국 대륙.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후연은 요동을 두고 고구려와 숙명의 대결을 펼쳤다. 400년부터 407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다. 조상의 원한을 씻고 동북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두 제국의 생존 게임이었다.

광개토왕은 어떻게 중국 북방의 강대국 후연을 무릎 꿇렸는가? 요동 벌판에서 펼쳐진 7년 전쟁의 기록을 따라가본다.

시대의 풍경 – 5호16국의 혼란

4세기 말, 중국 대륙은 5호16국 시대의 혼란 속에 있었다. 304년 서진이 무너진 후 흉노, 선비, 갈, 저, 강 등 5개 북방민족이 세운 16개 국가가 난립했다. 그 중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후연은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다.

384년, 모용수가 중산(지금의 허베이성 정저우)에 도읍하여 후연을 건국했다. 최대 강역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몽골 남부까지 이르렀다. 고구려와 후연의 악연은 342년 전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갔다. 고구려는 상당 기간 선비족에 외교적 저자세를 취해야 했다.

“영락 5년(395년), 왕은 비려가 불안정하자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00~700영을 격파하고, 노획한 소와 말, 양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광개토왕릉비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 5호16국

선비족 후연과 북위의 패권 다툼. 화북 일대 군웅할거

🗿 서로마

게르만 민족 대이동 시작. 410년 서고트족 로마 약탈

⚔️ 동로마

아르카디우스 황제 치세(395-408). 콘스탄티노플 안정기

⚔️ 400년 겨울, 국내성 왕궁

“대왕, 후연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했습니다!” 급보가 전해지자 광개토왕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신라 구원을 위해 5만 대군을 한반도로 보낸 사이를 노린 기습이었다. 후연왕 모용성은 3만 병력으로 소자하 유역을 점령하고 고구려 백성 5천 호를 끌고 갔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공격한다.” 광개토왕의 선언과 함께 7년 전쟁의 막이 올랐다. 402년 봄,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숙군성을 공격했다.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는 도망쳤다. 404년 대규모 정벌이 이어졌고, 405년 후연군이 요동성을 탈환하려 쳐들어왔지만 격퇴당했다. 406년 목저성 전투에서도 후연은 패배했다.

407년,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한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후연군은 궤멸되었고, 막대한 전리품이 노획되었다. 개선하는 길에 후연의 6개 성이 추가로 함락되었다. 요동은 완전히 고구려의 것이 되었다.

7년 전쟁의 진실

광개토왕과 후연의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다. 첫째, 이것은 복수전이었다. 342년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왕실 가족을 인질로 잡아간 치욕을 씻는 전쟁이었다. 385년 고국양왕이 요동 공격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째, 동북아시아 패권을 놓고 벌인 생존 게임이었다. 요동은 만주와 중국 북부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누가 요동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동북아 패권이 결정되었다. 후연은 5호16국 중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고, 한때 영토가 현재의 베이징에서 몽골 남부까지 이르렀다.

셋째, 광개토왕의 전략적 천재성이 돋보인 전쟁이었다. 그는 남쪽에서 백제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동시에 북방 경영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395년 비려(거란 일파) 정벌로 후연의 배후를 견제했고, 398년 숙신 정복으로 동부여 정벌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방면 작전을 동시에 수행한 것이다.

전쟁 기간

400-407년 (7년)

주요 전투

숙군성, 요동성, 목저성

최종 결과

요동 완전 장악

부가 정복

비려(395), 숙신(398)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광개토왕의 후연 정벌은 요동 패권을 놓고 벌인 전략적 전쟁. 407년 북연 성립 후 우호관계로 전환

논쟁점

407년 5만 대군 원정의 대상이 후연인지 백제인지에 대한 논란. 비문 마멸로 명확한 확인 불가

오늘 우리에게 묻다

광개토왕과 후연의 대결은 오늘날 강대국과의 경쟁에서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 복수는 차가운 머리로 계획해야 한다. 광개토왕은 60년 전 치욕을 잊지 않았지만 감정적으로 돌진하지 않았다. 395년 비려 정벌로 후연의 배후를 견제하고, 398년 숙신 복속으로 동북 국경을 안정시킨 후에야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둘째, 다방면 작전 능력이 국력이다. 광개토왕은 남쪽에서 백제·왜와 싸우면서도 동시에 북방 경영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현대 국가도 다양한 전선에서 동시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 셋째,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는 자가 패권을 쥔다. 요동은 만주와 중국을 연결하는 핵심 지역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반도체, AI, 우주개발 같은 핵심 기술 분야를 선점하는 것과 같다.

구분5세기 초 고구려21세기 한국
강대국 경쟁후연(선비족)과 요동 패권 다툼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 생존
전략적 요충지요동 (만주-중국 연결)반도체, AI, 배터리 핵심 기술
생존 전략다방면 동시 작전 (남진+북방 경영)경제안보·기술안보 동시 대응

📚 더 깊이 알아보기

  • 5호16국 시대: 흉노, 선비, 갈, 저, 강 5개 민족이 세운 16개 국가가 난립한 혼란기 (304-439)
  • 후연의 멸망: 407년 정변으로 북연 성립. 고구려는 북연과 우호관계 유지
  • 광개토왕릉비: 407년 기사 부분 마멸로 대상이 후연인지 백제인지 학계 논란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광개토왕은 후연과의 7년 전쟁을 통해 동북아시아 패권을 확립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다. 60년 전 조상의 치욕을 씻고,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며, 강대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국가 경영의 교과서였다.

 

“역사는 강한 자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인내심 있게 준비하는 자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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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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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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