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8화: 백제와 왜를 격파하다 – 396년 한강 유역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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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Korean Today News

[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8화: 백제와 왜를 격파하다 – 396년 한강 유역 장악

396년, 18세에 즉위한 청년 군주는 한강을 건넜다. 단 하나의 전투로 58개 성과 700개 촌락을 함락시킨 이 압도적 승리는 동아시아 패권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광개토왕의 백제 정복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었다. 한사군 이후 400년간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 균형을 고구려 중심으로 재편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백제 아신왕은 “영원한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굴욕적 맹세를 해야 했고,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바쳤다.

하지만 백제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왜(倭)와 손잡고 반격에 나선 백제의 도전에 맞서, 광개토왕은 400년 5만 대군으로 신라를 구원하고 404년 대방 지역에서 백제-왜 연합군을 전멸시켰다. 10년에 걸친 이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고구려가 주도하는 시대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시대의 풍경

4세기 후반, 동아시아는 격변의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5호16국 시대가 전개되며 후연(後燕)이 요동에서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에게 전사한 이후 고구려가 수세에 몰려 있었다.

391년, 18세의 광개토왕(담덕, 談德)이 즉위했다.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한 그는 즉시 공세로 전환했다. 즉위년 가을 7월 석현성을 비롯한 백제 10여 성을 함락시키고, 10월에는 7개 길로 나눈 대군으로 백제의 요충지 관미성(關彌城, 현재의 강화도-한강 하구 일대)을 20일간 공격 끝에 점령했다. 관미성 함락은 백제 수도권 한강 유역 전체를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대승이었다.

“이에 58성 700촌을 얻었고, 잔주(殘主=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於是 得 五十八城 村七百 將 殘主 弟 幷 大臣 十人 旋師 還都)”

– 출처: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396년)조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5호16국 혼란기. 후연(後燕) 모용보가 재위 중. 요동에서 고구려와 충돌

🗿 서유럽

로마제국 분열기. 서로마는 게르만족 침입으로 쇠퇴 중

🌏 한반도

백제 아신왕, 신라 내물마립간, 가야 연맹 전성기

⚔️ 그날의 현장 – 396년 봄, 한강을 건너다

“대왕! 한강이 보입니다!” 선봉장의 외침에 광개토왕은 말에서 내렸다. 23세의 젊은 왕은 수만 대군을 이끌고 한강을 바라보았다. 5년 전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이곳에서 백제군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 치욕을 씻을 시간이었다.

고구려군은 수군(水軍)과 육군으로 나뉘어 동시에 한강을 건넜다. 광개토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며 한강 하구로 진군했다. 백제는 58개 성곽과 700개 촌락을 잃었고, 아신왕은 한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신은 영원히 대왕의 노객이 되겠습니다.” 백제왕의 무릎 꿇은 항복은 동아시아 패권이 고구려에 넘어간 결정적 순간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1. 396년 백제 정복: 압도적 승리의 전략
광개토왕릉비는 396년 전투를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했다”고 기록한다. 58성 700촌이라는 구체적 숫자는 한강 이북부터 경기도 북부, 강원도 일부, 충청북도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의미한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 이후 한강 이북 지역에서 백제 유물이 급감하고 고구려 양식이 등장한다.

2. 400년 신라 구원: 5만 대군의 원정
399년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 내물마립간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400년 광개토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했다. “남거성(강원도 일대)에서부터 서라벌에 이르니 왜가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고,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김해)까지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 전투로 가야는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갔고,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국이 되었다.

3. 404년 대방 전투: 백제-왜 연합군의 최후
백제는 400년 신라 구원으로 고구려 주력군이 남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 404년 왜군과 함께 황해도의 옛 대방군 지역을 공격했다. 광개토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침입군을 전멸시켰다. 이 전투로 한반도에 주둔하던 왜군이 절멸하였고, 백제가 구축한 백제-가야-왜 해상 동맹도 완전히 붕괴되었다.

시대

396-404년

핵심 인물

광개토왕, 백제 아신왕

영토 확장

58성 700촌 획득

파병 규모

신라 구원 5만 대군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396년 전투로 고구려가 한강 이북을 완전 장악. 58성 700촌은 경기도 북부-강원도-충북 북부 지역으로 추정

논쟁점

관미성 위치(강화도설 vs 파주 오두산성설), 400년 왜군의 정체(일본열도 왜 vs 가야 지역 왜인)

오늘 우리에게 묻다

지역 패권 경쟁과 동맹 외교의 교훈
광개토왕의 남진 정책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전략적 구도 변화였다. 백제는 왜, 가야와 해상 동맹을 구축하여 고구려에 맞섰고, 고구려는 신라를 보호국으로 삼아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현대의 인도-태평양 전략이나 NATO 확대 같은 동맹 정치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압도적 군사력이 만든 국제 질서
396년 단 하나의 전투로 58성 700촌을 함락시킨 고구려의 군사력은 당대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400년 5만 대군의 신라 원정, 404년 대방 전투까지 10년간 고구려는 3면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며 승리했다. 오늘날 미국이 태평양-유럽-중동에서 동시 작전을 수행하는 것과 비견될 만한 국력이었다.

구분고구려 시대현재
지역 패권고구려 vs 백제-왜 동맹미중 경쟁, 인도-태평양 전략
동맹 체제백제-가야-왜 해상 네트워크AUKUS, QUAD 등 다자 안보
군사 전략3면 동시 작전 수행 능력미국의 2정면 전략

📚 더 깊이 알아보기

  •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명문 청동호우 –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결정적 유물
  • 관미성 위치 논쟁 – 강화도, 파주 오두산성, 교동도 등 여러 설이 존재
  • 400년 왜군의 정체 – 일본 《일본서기》 신공왕후 기사와의 연결 논란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396년에서 404년까지 10년간의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완전히 재편했다.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한반도의 패권국이 되었고, 신라를 보호국으로 삼아 남쪽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백제-가야-왜의 해상 동맹은 붕괴되었고, 고구려는 북으로는 후연, 남으로는 백제와 왜를 동시에 제압하는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우뚝 섰다.

 

“압도적 군사력과 전략적 동맹, 그리고 과감한 결단 – 광개토왕의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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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광개토대왕 – 정복 군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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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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