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6화: 미천왕과 낙랑군 – 313년, 한사군의 종말
대한민국이 1945년 광복을 맞았을 때, 우리는 일제 35년 지배를 끝냈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정확히 421년간 한반도 북부를 지배한 외세가 있었다. 기원전 108년부터 313년까지, 한사군이라는 이름으로.
313년 10월,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은 마침내 낙랑군을 축출했다. 400년 넘게 고조선의 고토를 차지했던 중국 세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영토 회복이 아니었다. 진정한 자주독립의 완성이었고, 이후 광개토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전성기의 출발점이었다.
소금장수에서 왕이 된 남자, 미천왕. 그는 어떻게 400년 묵은 숙제를 풀어냈을까? 서진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붕괴와 고구려의 기회 포착, 그 결정적 순간을 지금부터 들여다본다.
◆ 시대의 풍경: 혼란에 빠진 중원
300년, 미천왕이 즉위할 무렵 중국은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西晉)은 건국 불과 25년 만에 붕괴 직전이었다. 291년부터 시작된 ‘8왕의 난’은 황실 8명의 제후왕이 권력을 놓고 16년간 벌인 참혹한 내전이었다. 수십만 명이 죽었고, 수도 낙양은 여러 차례 함락되었다.
더 큰 재앙은 뒤따랐다. 304년 흉노족 유연이 반란을 일으키며 ‘한(漢)’을 건국했고, 311년에는 낙양이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것이 ‘영가의 난’이다. 한족 왕조가 본거지 중원을 완전히 잃은 초유의 사태였다. 이후 280여 년간 화북 지역은 ‘오호십육국시대’라는 대분열기에 접어들었다. 한마디로 중국은 나라가 아니었다.
“왕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3년(302년) 조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 서진
8왕의 난(291-306), 영가의 난(311), 오호십육국시대 시작. 중원 대분열의 시작
🗿 로마 제국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두 정치(293-305). 제국 분할 통치와 기독교 박해
🌏 사산조 페르시아
샤푸르 2세 즉위(309). 로마와 40년 전쟁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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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3년 10월, 그날의 현장
“장통이 끌고 갈 수 있는 백성은 모두 데려가라. 그러나 이 땅은 우리가 가져간다.”
낙랑군의 실질적 지배자 장통(張統)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11년 서안평이 고구려에 함락되면서 본국과의 육로는 완전히 끊겼다. 미천왕의 군대는 집요하게 낙랑을 압박했다. 해로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장통은 1천여 가구를 이끌고 요동의 모용외에게 투항했다. 421년간 지속된 한사군 지배의 종말이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은 우연이 아니었다. 치밀한 전략의 산물이었다. 그의 전략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 302년 현도군 공격으로 8천 명 포로 획득. 고구려의 군사력을 과시하고 한사군 세력을 압박했다. 2단계: 311년 서안평 점령. 이것이 결정타였다. 압록강 하구의 전략 요충지 서안평을 장악하면서 낙랑군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3단계: 313-314년 낙랑·대방군 순차 축출. 보급로가 끊긴 한사군은 버틸 수 없었다.
《삼국사기》는 “313년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간략히 기록했다. 하지만 《자치통감》은 더 구체적이다. “요동 사람 장통은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와 수 년에 걸쳐 서로 공격했으나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장통은 백성을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부했고, 모용외는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았다. 명목상 ‘낙랑’은 요서에 잠시 존재했지만, 실체가 없는 유령 군현이었다.
이 승리의 의미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섰다. 첫째, 고조선 고토의 완전한 회복. 기원전 108년 한 무제의 침략 이후 421년 만의 회복이었다. 둘째, 평양 일대 비옥한 평야 지대 확보. 이것은 고구려 경제력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왔다. 셋째, 중국 문물 직접 접촉. 낙랑은 선진 문물의 보고였다. 고구려는 이를 흡수하여 문화적으로 도약했다. 넷째, 요동 진출의 발판 마련. 배후 위협이 제거되면서 본격적인 북방 팽창이 가능해졌다.
시대
300-331년
핵심 인물
미천왕 을불
핵심 사건
한사군 축출
역사적 의미
421년 지배 종식
🔍 학계의 시각: 낙랑군의 위치 논쟁
주류 견해 (통설)
낙랑군은 평양 일대(대동강 유역)에 위치. 다수의 고고학적 증거(토성리 유적, 낙랑 고분군)가 뒷받침. 313년 미천왕이 이 지역에서 한사군을 축출.
대안적 견해 (재야 일부)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는 주장.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 부족. 2014년 북경에서 발견된 ‘낙랑군 조선현’ 묘는 313년 이후 이주민의 것으로 해석됨.
◆ 오늘 우리에게 묻다
313년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한 순간, 현대 한국인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기회 포착의 중요성이다. 서진의 8왕의 난과 오호십육국시대라는 혼란을 미천왕은 절호의 기회로 만들었다. 오늘날 글로벌 경쟁에서도 위기는 곧 기회다. 중국 기업들이 반도체 제재를 기회로 삼아 자체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처럼.
둘째, 전략적 사고의 힘이다. 미천왕은 낙랑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서안평을 먼저 점령하여 보급로를 차단했다. 간접적 접근이 때로는 더 효과적이다. 현대 비즈니스에서도 핵심 공급망을 장악하는 전략이 직접 경쟁보다 유효한 경우가 많다.
셋째, 자주독립의 가치다. 421년간의 외세 지배를 끝낸 313년은 단순한 영토 회복이 아니라 진정한 독립의 시작이었다. 오늘날 기술 주권, 경제 자립, 문화 정체성 확립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같은 핵심 산업에서 기술 자립이 절실한 시대다.
| 구분 | 미천왕 시대 | 현재 |
|---|---|---|
| 국제 정세 | 서진 붕괴, 5호16국 혼란기 | 미-중 패권 경쟁, 다극화 시대 |
| 자주성 | 421년 한사군 지배 종식 | 기술 주권, 경제 자립 추구 |
| 전략 | 서안평 점령 → 보급로 차단 | 핵심 공급망 확보 → 경쟁력 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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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313년,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한 그 순간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다. 421년간 이어진 외세 지배를 끝내고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룬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이후 광개토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전성기의 토대가 바로 여기서 마련되었다.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혼란 속에서 기회를 만들어라. 미천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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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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