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부르던 무대, 쉰여덟에 다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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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Korean Today News

 

봄이면 보릿고개라는 말이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은 논두렁에서 보리를 구워 손바닥에 비벼 먹었고, 그 고소한 맛은 배고픔을 잊게 해주는 작은 위로였다. 1968년생, 올해 쉰여덟이 된 나동수는 바로 그 세대다. 사람들은 그를 “늦깎이 신인가수”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 표현이 어딘가 불편하다. 그의 노래는 늦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마음속에서 자라온 것이기 때문이다.

 

 [코리안투데이] 나동수의 ‘늦은 데뷔’가 아니라, 가장 오래된 꿈에 대하여  © 김현수 기자

 

전남 구례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서울로 향하던 장면을 또렷이 기억한다. 삼륜차에 이불과 솥, 살림살이를 싣고 떠나야 했던 가난의 이동. 그 장면은 한 가족의 이사라기보다, 한 시대가 사람들에게 강요한 생존의 행렬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밝은 성격 덕분에, 삶을 이기는 법을 일찍 배웠다”고. 웃음은 그에게 도피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었다.

 

군 제대 후 곧장 일본으로 향했던 선택 역시 생존이었다. 유학 4년, 코피를 쏟아가며 버틴 시간, 그리고 1998년 IMF. 한국 사회 전체가 무너질 때, 그는 일본과의 무역 현장에서 다시 버텼다. 생산, 판매, 경영을 모두 껴안고 25년을 달려왔다. 안정은 얻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노래가 남아 있었다. 꿈을 잊은 것이 아니라, 접어 두고 살았을 뿐이다.

 

▲ [코리안투데이] 가난과 웃음 사이에서 자라난 노래의 뿌리     ©김현수 기자

 

그 꿈의 이름은 어머니였다. 세상을 떠난 지 세 해가 지난 어머니는, 생전에 늘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외할머니는 전국노래자랑에 세 번이나 도전했고, 노래를 배우겠다며 보릿자루 하나 메고 청학동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다. 그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노래하고, 흉내 내고, 웃음을 주던 소년의 기억은 결국 쉰여덟의 남자를 다시 무대로 불러냈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테너·알토·소프라노 색소폰을 불었고, 서도소리와 평안도 배뱅이굿을 익혔다. 일본과의 긴 교류 속에서 엔카의 끈적한 정서를 몸에 새겼다. 그의 노래에는 화려한 기교보다 삶의 결이 먼저 들린다. 최창남, 장민, 현철로 이어지는 민요형 트로트의 계보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남이 열 번 연습할 때, 나는 천 번 연습한다”는 己千의 태도는, 성공보다 태도를 먼저 묻는 그의 인생관을 닮았다.

 

▲ [코리안투데이] 25년의 생업 끝에 다시 꺼낸 무대 위의 꿈     ©김현수 기자

 

물론 세상은 냉정하다. “누구냐”, “왜 나왔냐”는 질문은 재능보다 나이를 먼저 묻는다. 그래서 그는 ‘도전 꿈의 무대’에 서려 한다. 인정받기 위해서라기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해서다. 이제는 벌 만큼 벌었고, 얻을 만큼 얻었다고 말하는 그의 다음 선택은 나눔이다. 문화와 예술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 박수받지 못한 무대에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다짐이다.

 

가수는 노래로 평가받지만, 사람은 태도로 기억된다. 나동수의 도전은 스타가 되기 위한 질주가 아니다. 그것은 한 세대가 품고 살았던 꿈에 대한 뒤늦은 책임이며, 어머니의 소원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아들의 대답이다. 쉰여덟의 무대는 그래서 늦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가장 어울린다. 삶을 다 통과해온 목소리만이 낼 수 있는 울림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묻는다. “지금 시작해서 되겠느냐”고. 그러나 그에게 묻고 싶다. “이제야, 제대로 부를 수 있지 않느냐”고. 무대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진심이 있는지만 묻는다. 그리고 그의 노래에는, 그 진심이 오래도록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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