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4화: 국내성 천도 – 평야에서 산성으로
기원전 3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악 지대에서 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압록강 중류의 넓은 분지, 지금의 집안 지역이었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단행한 이 천도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자, 400년을 이어갈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역사적 결단이었다.
오늘날 세종시 건설과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뜨거운 한국 사회에, 고구려의 국내성 천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안보와 발전,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고구려의 선택을 살펴본다.
◆ 시대의 풍경
기원전 1세기 말, 동아시아는 격변의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전한이 쇠퇴하고 왕망의 신나라가 들어서는 혼란기였고, 북방에서는 흉노와 선비가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한반도 북부에서는 한사군이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버티고 있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건국한 이래 혼강 유역의 졸본(환인)을 수도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북쪽의 부여는 끊임없이 압박해왔고, 남쪽의 한 군현은 언제나 위협이었다. 좁은 산악 지대에 갇힌 고구려는 성장의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왕이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도망쳐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다. 설지가 이를 쫓아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위나암은 지세가 험준하고 토지가 기름지며 오곡이 잘 자라고 물고기와 소금이 풍부하니, 도읍을 정하기에 마땅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 출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1년(기원전 2년)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전한 말기 왕망의 신나라 건국 (8년). 한나라 멸망 전야의 혼란기. 고구려에게는 기회의 시기.
🗿 로마제국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 (재위 기원전 27-서기 14년). 팍스 로마나의 전성기.
🌏 한반도
백제 온조왕 시대, 신라 유리이사금 시대. 삼국시대 초기 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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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3년 늦가을, 국내성
유리왕은 압록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섰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평야는 졸본의 좁은 골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이곳이면 만 명의 군사를 먹일 수 있을 것이오.” 재상 설지가 말했다. 왕의 시선이 북쪽 산봉우리로 향했다. 해발 676미터, 험준한 바위산이 도성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평시에는 이곳 평지에서, 전시에는 저 산성으로.” 유리왕의 결정이었다. 이것이 고구려가 만들어낸 독특한 도성 체계,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 구조였다. 평화 시에는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위기 시에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신하는 시스템. 이 혁신적 구조는 이후 400년간 고구려를 지켜낼 것이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은 21년(기원전 2년) 교제용 돼지가 도망친 사건을 계기로 국내성 천도를 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계기일 뿐, 실제로는 치밀한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압록강 중류의 집안 지역은 여러 면에서 이상적인 수도 입지였다.
첫째, 안보상 이점이 컸다. 졸본보다 한 군현에서 더 멀어져 중국의 직접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시에 북쪽 부여와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압록강과 통구하가 천연 해자 역할을 하고, 배후에는 환도산(높이 676m)이 버티고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둘째,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 집안 분지는 압록강 유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 지대로 ‘소강남(小江南)’이라 불릴 만큼 농사짓기 좋았다. 압록강 수로망을 장악하면 동옥저의 곡창 지대로 진출할 수 있었고, 물길을 이용한 교역도 가능했다. 이는 국가 경제 기반을 든든히 하는 선택이었다.
셋째,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졸본은 소노부의 본거지였지만, 국내로 이동함으로써 유리왕은 기존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는 것, 이것이 천도의 또 다른 목적이었다.
천도 시기
기원전 3년 (유리왕 22년)
수도 기간
약 400년 (427년 평양 천도까지)
도성 구조
국내성(평지성) + 환도산성(산성)
성벽 둘레
국내성 2.7km / 환도산성 6.95km
🔍 학계의 시각: 천도 시기 논쟁
통설 (유리왕대 설)
《삼국사기》 기록대로 기원전 3년(유리왕 22년) 천도. 환인 지역의 위나암성이 최초 천도지.
재검토설 (산상왕대 설)
집안 국내성에서 3세기 이전 유물 미발견. 198년 산상왕 대에 환도산성 축조하며 집안으로 천도했을 가능성.
💡 핵심: 천도 시기와 무관하게, 평지성-산성 이중 구조는 고구려 도성 체계의 획기적 혁신이었다는 점에 학계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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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에게 묻다
2012년 세종시가 출범했다. 2024년 현재까지 행정수도 이전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국회와 청와대를 옮길 것인가, 아니면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첨예한 논쟁 속에서 고구려의 국내성 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구려는 단순히 수도를 옮긴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시 시스템을 창조했다. 평화와 전쟁,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고려한 이중 구조. 서울과 세종, 두 도시의 역할 분담을 통해 국가 균형 발전을 도모하는 현대 한국의 모습이 1,600년 전 고구려와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 구분 | 고구려 시대 | 현재 한국 |
|---|---|---|
| 도시 구조 | 평지성 + 산성 이중 체계 | 서울 + 세종시 이원화 |
| 천도 목적 | 안보 강화 + 경제 발전 기반 | 수도권 과밀 해소 + 균형 발전 |
| 핵심 고민 | 생존과 성장의 균형 | 효율과 형평의 균형 |
📚 더 깊이 알아보기
- 환도산성의 축성 기법: 오각형 쐐기돌을 사용한 고구려만의 독특한 석축 기술
- 246년 관구검의 침입: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함락당했지만, 이중 구조 덕분에 고구려는 빠르게 회복
- 집안의 고구려 유적군: UNESCO 세계문화유산 (2004년 등재). 광개토대왕릉비, 장군총, 태왕릉 등이 모두 이곳에 위치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기원전 3년 유리왕의 결단은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보와 발전,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한 고구려의 국가 전략이었다.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 구조는 이후 400년간 고구려를 지켜냈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기를 가능케 했다.
“도시는 돌과 나무로만 세우는 것이 아니다. 비전과 전략으로 세우는 것이다.”
– 국내성 천도가 21세기 한국에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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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제5화: 고국천왕의 개혁 – 왕권 강화와 국가 체제
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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