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5화: 고국천왕의 개혁 – 왕권 강화와 국가 체제
“백성이 굶주림에 우는 것은 내 잘못이다.”
2025년 대한민국, 복지 예산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기본소득이냐 선별복지냐, 보편적 복지냐 맞춤형 지원이냐. 그런데 이런 고민이 1,800년 전 고구려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은 한국 역사 최초로 국가 주도 사회복지제도를 만들었다. 굶주리는 백성에게 봄철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진대법’.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귀족의 고리대를 막고 농민의 노비화를 방지하며 왕권을 강화하는 치밀한 전략이 숨어있었다.
◆ 시대의 풍경
179년 12월, 신대왕이 승하하자 둘째 아들 남무가 왕위에 올랐다. 고국천왕이다. 키 9척(약 210cm)의 거구에 힘이 장사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순탄한 통치가 아니었다.
고구려는 5개 부족의 연합체였다. 계루부 왕실, 그리고 연나부·소노부·절노부·관노부의 4부. 각 부는 독자적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사실상 독립된 정치체였다. 왕은 있었지만 왕권은 약했다. 특히 왕비족인 연나부는 막강한 세력으로 왕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 시대 중국은 황건적의 난(184년)으로 후한이 무너지고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왕이 키가 9척이고, 용모가 늠름하고 훌륭하며, 힘이 매우 세어 남의 말을 잘 듣고 판단하여 일을 처리하며, 관대함과 용맹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 출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4권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후한 말기 혼란, 184년 황건적의 난, 조조·유비·손권 등장
🗿 로마
콤모두스 황제 시대(180-192), 5현제 시대 종료, 군인황제 시대 서막
🌏 한반도
백제 고이왕 즉위(234), 신라 내해이사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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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현장
190년 9월, 왕궁에 긴장이 흘렀다. 왕후의 친척인 중외대부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가 권세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았다. 그들의 자제들은 남의 자식을 노략질하고 땅과 집을 빼앗았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고국천왕이 그들을 처벌하려 하자, 좌가려는 연나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후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왕도가 포위되었다. 고국천왕은 직속 병력을 이끌고 반란군과 맞섰다. 191년 4월, 7개월에 걸친 내전 끝에 반란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왕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을파소의 등용 – 능력주의의 승리
반란 진압 후, 고국천왕은 결단을 내렸다. 4부에 영을 내려 인재를 천거하게 했다. 동부의 안류가 천거되었으나, 안류는 사양하며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서압록곡 좌물촌에서 농사를 짓는 을파소였다. 을파소는 유리왕 때 대신 을소의 후손이었지만, 외척의 미움을 사 파면당한 아버지 때문에 50세가 넘도록 농부로 살고 있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중외대부로 임명했다. 그러나 을파소는 “이 관직으로는 제가 뜻하는 바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그 뜻을 알아채고 그를 국상(재상)으로 임명했다.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 친척들이 농민 출신 신진 관료를 국상으로 삼은 것에 분노했다. 고국천왕은 단호했다.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는 교서를 내렸다.
194년의 기적 – 진대법의 탄생
194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10월, 고국천왕이 질양에 사냥을 나갔다가 길가에서 우는 자를 발견했다. “왜 우는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저는 매우 가난하여 품을 팔아 어머니를 모셨는데, 올해는 품팔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왕이 탄식했다.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죄다.” 그는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고, 관리들에게 명하여 홀아비·과부·고아·무의탁 노인·병들어 자립할 수 없는 자들을 널리 찾아 구제하게 했다. 그리고 진대법을 실시했다.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가의 곡식을 가구 수에 따라 차등 있게 빌려주고, 10월에 갚게 하는 제도였다.
재위 기간
179-197년 (18년)
핵심 인물
국상 을파소
핵심 업적
진대법 실시
영향
중앙집권화 촉진
🔍 학계의 시각
진대법의 의미
단순한 구휼책이 아니라 귀족의 고리대를 차단하고 농민의 노비화를 방지하여 왕권을 강화한 정치적 제도
세계 최초?
인도 마우리아 왕조(BC 268-232)에도 유사제도 존재. 세계 최초는 아니나 한국사 최초의 국가 복지제도
◆ 오늘 우리에게 묻다
고국천왕의 개혁은 현대 한국사회에 무엇을 묻는가? 첫째, 사회안전망의 본질이다. 진대법은 시혜가 아니라 농민의 자립을 돕는 제도였다.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왕의 죄”라는 인식. 이것이 복지국가의 철학 아닌가.
둘째, 능력주의의 가치다. 50세 농부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한 결단. 2025년 한국도 여전히 학벌·지연·혈연이 횡행한다.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는 언제 오는가? 셋째, 제도 개혁의 정치학이다. 기득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개혁을 관철시킨 리더십.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이라는 단호함. 개혁은 결국 정치적 의지의 문제다.
| 구분 | 고구려 시대 | 현대 한국 |
|---|---|---|
| 복지 철학 | 진대법 (봄 대출, 가을 상환) | 긴급생계지원, 기초생활보장 |
| 인재 등용 | 농민 출신 을파소 → 국상 | 학벌·지연 중심 인사 관행 |
| 왕위 계승 | 형제상속 → 부자상속 전환 | 민주적 리더십 승계 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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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깊이 알아보기
- 진대법은 고려의 의창, 조선의 환곡으로 계승되었으나, 조선 후기 환곡은 부세화되어 민란의 원인이 되었다.
- 을파소는 203년(산상왕 7년) 사망할 때까지 12년간 국상으로 재직하며 고구려 중앙집권화를 이끌었다.
- 고국천왕의 부자상속 전환은 이후 고구려 왕위 계승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백성이 굶주림에 우는 것은 내 잘못이다.” 1,800년 전 한 왕의 고백이 오늘도 울린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다. 능력주의는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다. 개혁은 말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다.
고국천왕이 심은 개혁의 씨앗은 고구려를 넘어 한국사 전체에 뿌리를 내렸다. 역사는 묻는다. 우리는 그 유산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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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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