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2화: 부여에서 고구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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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Korean Today News

[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2화: 부여에서 고구려로 – 계승과 독립의 이중주

삼성이 소니에서 배우면서도 삼성이 되려 했듯이,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배우면서도 고구려가 되려 했다.

BC 37년, 주몽은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웠다. 하지만 고구려는 결코 부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부여의 후예”라고 당당히 선언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나라”라는 독자성을 주장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전략이었다.

왜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부여와 싸웠을까?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혁신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가능할까?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이 직면한 과제가 1세기 고구려에도 있었다.

시대의 풍경

BC 19년, 동명성왕 주몽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 유리가 왕위에 올랐다. 유리왕은 부여에서 아버지를 찾아온 인물이었다. 그는 부여의 왕족이었지만, 고구려의 왕이 되었다. 이 복잡한 정체성이 바로 고구려 초기의 핵심 딜레마였다.

당시 동아시아 상황을 보자. 북쪽에는 강대국 부여가 있었고, 남쪽에는 한나라 군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작은 산악 국가에 불과했다. 국력으로는 부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는 꿈이 있었다.

“우리 선왕(금와왕)이 그대의 선왕인 동명왕과 서로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대국을 섬기지 않고 작은 나라로서 대국을 거역하는가?”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8년(서기 9년), 부여 사신의 편지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전한 말기 혼란(왕망의 신나라, AD 9-23). 고구려는 이 틈을 노린다.

🗿 로마제국

아우구스투스 치세(BC 27-AD 14). 팍스 로마나의 시작.

🌏 한반도

마한·진한·변한 삼한 시대. 백제 건국(BC 18)

⚔️ 서기 3년 가을, 국내성

유리왕은 졸본성의 높은 성벽 위에 섰다. 북쪽 하늘을 보았다. 저 너머에 부여가 있다. 그가 태어난 곳, 그의 아버지가 도망쳐 나온 곳. “이곳을 떠나야 한다.” 신하 설지가 말했다. “위나암, 그곳이 새로운 수도가 될 곳입니다.”

천도는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부여의 그림자가 아니다.” 압록강 중류의 국내성. 산성과 평지성이 결합된 이 새로운 도읍은 427년까지 400년간 고구려의 심장이 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고구려의 정체성 형성 과정은 복잡했다. 주몽은 부여 출신이었고, 유리왕 역시 부여에서 태어났다. 고구려 왕실의 성씨가 초기에는 ‘해(解)씨’였다는 것도 부여 왕족과의 연결을 보여준다. 하지만 고구려는 결코 “부여의 지방 정권”이 되려 하지 않았다.

서기 3년, 유리왕의 국내성 천도는 상징적이다. 졸본에서 국내로 약 40km를 이동한 이 천도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부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국내성(현재 중국 지안시)은 압록강 중류의 교통 요충지로, 남쪽의 한사군과 북쪽의 부여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부여는 고구려를 쉽게 놔두지 않았다. 서기 9년, 부여 대소왕은 고구려에 편지를 보냈다. “대국과 소국의 관계”를 명확히 하라는 요구였다. 고구려가 거부하자 부여는 5만 대군을 동원해 침공했다. 하지만 대설로 인해 실패했다. 이 사건은 고구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부여를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시대

BC 19 ~ AD 44

핵심 인물

유리왕, 대무신왕

핵심 사건

국내성 천도(AD 3)

영향

독자 국가 체제 확립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고구려는 부여계 지배층과 고조선계 피지배층의 융합으로 형성. 부여 문화를 계승하되 독자성 추구.

대안적 견해

고구려의 부여 계승 주장은 후대의 정당성 확보 전략. 실제로는 고조선의 직접 계승자.

오늘 우리에게 묻다

한국 재벌 2세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질문이 있다. “아버지의 방식을 계승할 것인가, 나만의 길을 갈 것인가?” 이건희는 이병철의 아들이었지만, 이병철과는 다른 삼성을 만들었다. 전통을 존중하되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구려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우리는 부여에서 왔다”는 정통성을 유지하면서도, “우리는 부여가 아니다”는 독자성을 확립했다. 이 균형이 바로 성공하는 조직의 DNA다. 구글이 스탠퍼드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구글만의 혁신을 만들어낸 것처럼.

구분고구려 시대현재
정체성부여 계승 + 고구려 독자성글로벌 기준 + 한국 독창성
전략국내성 천도로 독립 기반 구축본사 이전으로 신시장 개척
관계 설정부여 문화 존중, 정치 독립모기업 기술 활용, 경영 독립

📚 더 깊이 알아보기

  • 국내성(環都山城)은 산성(丸都山城)과 평지성(國內城)의 이중 구조로 평시에는 평지성, 전시에는 산성 사용
  • 대무신왕 때 우보(右輔)·좌보(左輔) 제도 확립으로 중앙집권 체제 강화
  • 부여의 마지막 왕 잔왕은 494년 고구려 문자왕에게 항복하며 부여 완전 멸망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전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혁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 뿌리를 기억하면서도 새로운 가지를 뻗는 것. 고구려는 그렇게 부여를 넘어섰다.

 

“계승과 혁신, 둘 다 가능하다. 고구려가 그것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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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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