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평화가 공허한 구호로 소비되는 이유는 행동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의 메시지가 현대인에게 불편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평화의 책임을 국가나 제도에만 돌리지 않고 개인의 일상으로 확장했다는 데 있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무기’는 물리적인 총기나 미사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인을 향한 혐오의 언어, 상대를 멋대로 규정하는 편견의 시선, 그리고 소통을 거부하는 단절의 침묵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잔인한 무기다. 일상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면서 ‘세계 평화’를 외치는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는 따끔한 지적이다.
이 대목에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2025년 유엔 세계 평화의 날 행사에서 들은 한 발표자의 이야기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 병사는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지 않았다. 총을 들고 있었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는 적군을 ‘적’이 아니라, 자기 몸처럼 보호해야 할 존재이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로 바라보았다.
그 병사의 생각은 단순했다. 전쟁이 멈추려면 아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적군의 생명도 똑같이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전쟁의 논리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선택이다. 명령과 공포, 증오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생명을 먼저 떠올린다는 것은 결단에 가깝다. 그러나 그 결단이 있었기에, 그 전쟁터의 어느 순간은 총성이 아닌 인간성으로 기록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존재하기에, 세상의 평화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평화는 거대한 협정이나 선언문에서만 진전되지 않는다. 이름 없는 한 사람의 행동에서, 전쟁의 논리가 잠시 멈춰 설 때 평화는 현실이 된다.
교황이 강조하는 평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갈등을 지우는 평화가 아니다. 갈등을 직시하는 평화다. 차이를 없애려는 시도는 언제나 새로운 폭력을 낳아왔다. 평화는 동일함이 아니라 공존에서 시작된다. 서로 다른 기억과 상처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견디는 힘이 평화의 출발점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평화가 ‘갈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차이를 없애려는 강압적인 시도는 늘 새로운 폭력을 낳았다. 진정한 평화는 서로 다른 상처와 기억을 인정하고, 그 불편한 차이를 견뎌내는 공존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교황은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의 제도를 마련하라”며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군비 경쟁을 통한 억제력보다, 갈등을 사전에 예방하고 치유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 과정의 중심에는 ‘용서’라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용서 없는 정의는 결국 복수로 변질되어 전쟁의 악순환을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2026년 교황의 담화는 평화를 과거의 유산이 아닌 미래의 필수 조건으로 선포한다. 평화는 먼 곳의 정치적 담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내하고 무기를 내려놓는 그 순간 현실이 된다.